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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場)/간(間)/들(多)/사이- 공간

곳(場)/간(間)/들(3)- 울퉁불퉁한 원-<사람(랑)사슬>展

곳(場)/간(間)/들(3) 울퉁불퉁한 원-<사람(랑)사슬>展

 

 

 


 

 

 

 

 

 

 

1.
생소했다. 참여한 모든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무척 상세히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성실하게, 준비한 페이퍼를 읽으며 자신이 진행해왔던 작업의 궤적을 설명하고 지금의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정황에 관해 말했다. 모두가 조금은 흥분해 있었는데, 아마도 자신의 작품을 '잘 설명해야 한다'는 과제를 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한 작업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직접 말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원 수업에서 만난 이들이 세미나를 조직해 함께 공부를 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한 작업이란 단지 방법론이나 주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선생의 도움없이, 출신 학교를 기반으로 접속하는 미술장의 시스템이 부여하는 길이 아닌 동료 작가들과의 협력으로 전시를 구성했다는 점이야말로 ‘다른 방식’이자 ‘다른 길’의 요체일 것이다. 그러니 생소함의 정체란 작가들의 상세한 프리젠테이션에 있는 것이 아리나 협력을 통한 다른 길을 제시하는 그 행위에 있었던 것!

2.
<사람(랑)사슬>이라는 기획전을 보며 평론가 신형철이 손택수의 시를 자신의 말로 갈음한 문장을 떠올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읽는 이로 하여금 속절없이 동의하게 만드는 이 문장이 얄밉기도 하고 그의 매끄러운 비유가 이토록 울퉁불퉁한 세계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던 차, 참여 작가 모두가 나와 패널들과 토론을 하는 장면을 보며 나는 ‘매끄러운 문장(세계)’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고쳐 쓸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 아니라 사각들의 만남으로 울퉁불퉁한 원을 만드는 것이다.’

3.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의 기쁨과 그 에너지가 전시장에 넘쳐 났다. 더운 전시장에서 3시간동안 대화를 진행할 수 있었던 동력이 배운 이론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을 때의 기쁨으로부터 촉발된 것임을 알겠다. 작가들이 한결 같이 강조한 새로운 배움이란 생소했던 ‘이론’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한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라는 새로운 만남의 방식을 작업의 방법론으로 도입한 것이지 않을까. 그러니 이 기획 전시에서 눈여겨 봐야 하는 것은 개별 작품들의 완성도가 아니라 작품과 작품 사이를 희미 하게 잇고 있는 ‘함께’의 흔적일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그리 선명하지 못했고 작가들의 프리젠테이션도 9할이 자신의 작품의 궤적을 설명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이 기획전이 성사되었다는 것에 방점을 찍어두고 싶다. 누군가가 ‘죽어주었기’에 이 기획전이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의 작가는 이전의 ‘나’와 결별(자아를 죽이고)하고 심지어 자신의 작업물을 훼손하면서까지 다른 길로 가겠다는 강력한 태도를 피력했지만 그것이 자기비판을 수행하며 또 다른 나를 내세우는 회로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모든 작가들이 수행하고 있는 ‘성찰’이 결국 ‘이전의 나와 결별’하는 ‘자아성찰’이라는 점에서 ‘나’(나르시시즘)로부터 얼마나 거리를 둘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함께 하는 이 작업에서 누군가가 ‘나’를 내세우지 않고 죽어주었기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던 것일 게다. 보이지 않은 죽어주기가 있었기에 ‘사람(들)’ 속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을 터. ‘울퉁불퉁한 원’을 발명할 수 있었을 터.

4.
지역에는 하나‘만’ 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선, 자신의 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선 기존(유일한)의 하나에 편입해야 한다. 이때 자연스레 위계가 만들어진다. 귀한 호의이기에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되는 위계말이다. 이 완전무결한 위계의 학습을 통해서만 ‘하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대개의 선생과 선배들은 제자와 후배에 무관심 하지만 몇몇 선생과 선배는 기꺼이 제자와 후배를 돕는다. 바로 이 ‘귀한 도움’ 속에 내재되어 있는 ‘위계’라는 암묵적인 동의 구조가 못내 아쉽다. 그러니 동료보다는 선생과 선배에 의지해야만 ‘하나’에 접근할 수 있다. 여러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음에도 <사람(랑)사슬>展이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답습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그 점이 아쉬웠다. <배우는 사람으로서 ‘아직’은 (정식) 작가가 아니라는 이야기(태도)>가 희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더 많은 동료보다는 더 많은 선생과 선배들의 도움이지 않을까? 토론 중에 몇번 거론되었던 ‘<사람(랑)사슬>이 계속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했다. 나는 이 물음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계속 되지 않아도 이 작업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리고 계속될 필요도 없다. ‘계속’(연속)보다는 ‘또 다시’(실험) 하면 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동료를 만나야 하며 ‘함께’라는 실험을 다시 시도해야 한다. 그때 삶과 예술을 이어주는 또 다른 사슬이, ‘울퉁불퉁한 원’ 속에서 선생과 선배가 동료가 되는 기적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전시 ‘사람(랑)사슬’_2013.7.12-7.16
장소 : 인디스페이스 아지트_부산시 금정구 장전동 74-36번지(https://www.facebook.com/indiespaceagit)
참여 작가 : 권도유, 김은주, 박세란, 박에스더, 심소정, 전이영, 하민지, 엄준석(기획)